» “전력 수요 감당 못해”…‘원전 르네상스’ 뛰어든 美·日·EU, 한국은?

“전력 수요 감당 못해”…‘원전 르네상스’ 뛰어든 美·日·EU, 한국은?

▲미국 조지아주 보글 원전 냉각탑(사진=AP/연합)

세계 각국에서 원자력발전소를 새로 도입하거나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이른바 ‘원전 르네상스’가 본격화하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급증, 탄소중립 목표 달성, 에너지 안보 강화 필요성이 맞물리면서 원자력이 다시 핵심 전력원으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최근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 여파로 에너지 수급 불안이 커진 점도 원전 확대 움직임에 힘을 보태고 있다.

◇ 미국, 27조원 투입해 신규 원전 10기 추진

주요 외신에 따르면 미국 에너지부는 23일(현지시간) 대형 원자로 건설에 필요한 장비를 확보할 수 있도록 전력회사들에 총 175억달러(약 27조원) 규모의 저금리 대출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번 지원은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의 주력 모델인 1.1기가와트(GW)급 AP1000 원자로 10기 건설 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한다.

에너지부에 따르면 전력회사 7곳이 사업 참여 의향서(LOI)를 이미 제출한 상태다. 미 정부는 이 가운데 5개 프로젝트를 선정할 계획이며, 선정된 사업에는 원자로 2기씩 건설할 수 있는 자금이 지원된다.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이번 지원을 통해 2030년까지 원자로 10기 모두가 착공에 들어가고, 이르면 2035년부터 전력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는 원전 산업 부흥을 추진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 기조와도 맞닿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전을 AI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 성장의 핵심 전력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 원전 설비용량을 현재의 약 4배인 400GW까지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으며, 이를 위해 2030년까지 대형 상용 원자로 10기를 착공하겠다는 계획도 내놓았다.

미 정부 추산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는 지난해 미국 전체 전력 소비의 4~5%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 비중은 2028년까지 세 배 가까이 늘어날 수 있다. AP통신은 일부 전문가들이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향후 10년 동안 미국 전체 전력 수요가 최대 20%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전했다.

라이트 장관은 이번 사업을 “차세대 미국 원전 르네상스”를 촉발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미국은 앞으로 훨씬 더 많은 대형 원자로를 건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댄 섬너 웨스팅하우스 최고경영자(CEO) 역시 미국이 AI와 첨단 제조업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원전 건설이 대규모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원전 산업 활성화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백악관)

◇ 일본도 탈원전 후퇴…최대 14기 교체 추진

일본 역시 원전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 기조를 강화했던 일본은 최근 전력 수요 증가와 지정학적 위험 확대에 대응하기 위해 원전 교체 정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최근 원자력 정책 가이드라인 개정안을 내부 위원회에 제출했다. 개정안에는 2040년까지 최대 5기의 원전을 재건축하고 이후 2050년대까지 9기를 추가해 총 14기를 새로 짓는 방안이 담겼다.

경제산업성은 2040년대까지 원전 설비용량 2.2~5.5GW를 확보하기 위해 2~5기의 신규 원전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2050년대에는 총 설비용량을 12.7~16GW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 최대 14기의 원전을 확보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경제산업성은 “디지털 전환과 녹색 전환에 따른 전력 수요 증가가 예상된다”며 “중동 정세를 비롯한 지정학적 위험이 확대되면서 에너지 안보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EU 깃발들(사진=로이터/연합)

◇ 유럽도 원전 회귀…투자 열풍 확산

유럽에서도 AI 데이터센터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급증과 에너지 안보의 필요성이 부각되면서 원전이 핵심 정책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유럽 원전 산업의 인수합병(M&A) 시장도 활기를 띠고 있다.

에너지 전문 매체 엔릿월드에 따르면 글로벌 로펌 화이트앤드케이스는 지난해 유럽 원전 산업의 M&A는 총 25건으로, 2024년의 17건보다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7년 사이 가장 많은 수준이다. 올해 M&A도 작년과 비슷한 흐름을 보일 것으로 전망됐다.

화이트앤드케이스의 핵융합·원전 프로젝트 금융 전문 변호사인 시메나 바스케스-메이냥은 “유럽 원전 산업에 대한 M&A와 지분 투자 매력도가 한 세대 만에 가장 강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는 과거 원전 금지 정책을 되돌리려 하고 있으며 핀란드와 스웨덴은 공격적인 원전 확대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며 “영국도 원전 프로젝트를 신속히 추진하기 위해 규제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에너지원이었던 원자력이 이제는 필수 인프라로 인식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EU) 차원에서도 원전 확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EU 집행위원회가 최근 발표한 원자력실태프로그램(PINC) 최종안에 따르면 2050년까지 대형 원전의 순 발전용량을 109GW로 확대하기 위해 총 2410억유로(약 421조원)의 투자가 필요하다. 이 가운데 2050억유로(약 358조원)는 신규 원전 건설에, 360억유로(약 62조원)는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에 투입될 것으로 추산됐다.

PINC는 또 2050년까지 소형모듈원전(SMR) 설비용량이 17~53GW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3월 열린 원자력 서밋에서 유라톰(Euratom) 연구·훈련 프로그램에 3억3000만유로(약 5700억원)를 투입하고, SMR 개발을 지원하기 위한 2억유로(약 3500억원) 규모의 보증기금도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8일 신규 대형 원전 2기 건설 부지로 선정된 경북 영덕군 영덕읍 노물리에 원전 유치 찬성 현수막이 붙어 있다. 이 마을은 지난해 3월 대형 산불로 많은 집이 타는 등 큰 피해가 났다.

◇ 한국도 신규 원전 건설 절차 본격화

한국의 경우 새 정부 출범 초기 신규 원전 건설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지만 전력이 급증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르자 원전 건설에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원전 지을 데가 없다”면서 “당장 엄청난 전력이 필요한데, 원전은 지어서 가동하는데 최소 15년이 걸린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 신규 원전을 건설할지 논의하는 두 차례 토론회와 여론조사가 실시됐고, 이 여론조사에서 계획대로 원전을 짓자는 여론이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정부는 지난 1월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확정했고 지난 17일에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반영된 신규 대형 원전 2기의 후보지로 경북 영덕군을 선정했다. SMR 후보지로는 부산 기장군이 결정됐다.

작년 2월 확정된 11차 전기본에는 2037년과 2038년 도입을 목표로 1.4GW(기가와트)급 원전 2기를 짓는 계획이 반영됐다. 0.7GW급 소형모듈원자로(SMR)를 2035∼2036년 도입을 목표로 건설하는 계획도 담겼다.

다만 이번 발표는 후보지 선정 단계인 만큼 실제 원전 건설까지는 환경영향평가와 건설 허가, 주민 협의 등 후속 절차를 거쳐야 한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