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모습.
글로벌 인공지능(AI) 열풍의 최대 수혜 시장으로 주목받으며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던 한국 증시가 투자자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규모 자금 이탈에 개인 투자자들의 투자 열기마저 식으면서 코스피는 하반기 들어 세계 주요 증시 가운데 가장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 증시를 떠받쳐온 매수세가 빠르게 약화하자 코스피의 부진한 흐름이 얼마자 더 지속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11일 블룸버그통신은 “시가총액 4조3000억달러(약 5700조원) 규모의 한국 증시가 거의 모든 지표에서 투자자들에게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증시의 거래대금은 지난 5월 말 고점 대비 70% 급감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아시아 주요 증시 가운데 가장 빠른 속도로 한국 시장에서 자금을 빼내고 있으며, 국내 개인 투자자들 역시 투자 규모를 줄이고 있다.
그 결과 올해 상반기 세계 주요 주가지수 가운데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던 코스피는 하반기 들어 22% 하락하며 최악의 성적을 내고 있다. 같은 기간 AI 관련주 비중이 높은 대만과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한 것과 대조적이다.
이 같은 흐름의 중심에는 국내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다. 코스피 시가총액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 증시 폭등을 이끌었다. 그러나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인 두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 한국 증시가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는 점이 오히려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호황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지속되는 와중에 지난 7월 단일종목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청산 여파로 글로벌 투자자들이 국내 증시 복귀를 주저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지적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사진=로이터/연합)
문제는 국내 증시를 둘러싼 악재가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레일리언트 글로벌 어드바이저스의 필립 울 포트폴리오 운용 총괄은 “대부분의 투자자, 특히 메모리 반도체 투자 열풍을 보고 최근에야 한국 시장에 진입한 투자자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 분야에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시기가 이미 지났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사 펀드가 한국 AI 관련주에 대해 차익 실현에 나서고 있다며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해 ‘비중 축소’를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세계 최대 메모리 반도체 생산업체인 삼성전자가 3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약 9배 급증하는 실적을 발표했음에도 주가는 당일 2% 넘게 급락했다.
외국인의 국내 증시 이탈 규모도 이례적인 수준이다. 블룸버그가 한국거래소 자료를 분석한 결과, 외국인은 올해 들어 한국 증시에서 1310억달러(약 176조원)를 순매도했다. 이는 아시아 주요 증시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국내 증시에 새로운 매수 주체가 등장할지도 불확실하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추진해온 총 55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이 종료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부담을 키우고 있다. JP모건체이스에 따르면 지난달 한국 증시에서 발생한 약 230억달러(약 30조원) 규모의 매수 주문 가운데 대부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사주 매입에서 비롯됐다.
줄리어스베어의 리처드 탕 홍콩 리서치 총괄은 “자금이 점점 더 미국 주식시장으로 다시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한국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개인 투자자들도 지난 7월 증시 급락 이후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다.
금융투자협회 자료에 따르면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지난 6월 38조6000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최근 한 달 동안 33조원 안팎에 머물고 있다. 증권사의 투자자 예탁금 역시 사상 최고치였던 약 140조원에서 100조원 안팎으로 감소했다.
픽테자산운용의 존 위다르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현재 이익 수준을 기준으로 주가가 저렴한 가치주가 됐다”면서도 “개인 투자자와 단기 수익을 추구하는 헤지펀드들은 가치와 저평가 대신 성장을 좇는다”고 지적했다.
▲올해 코스피(검은색) 지수와 대만 가권지수(주황색) 추이(사진=블룸버그)
일각에서는 최근 코스피 하락을 저가 매수로 보고 있으며 정부가 추진하는 기업가치 제고 정책 역시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한국 증시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대만 증시가 AI 투자 열풍의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올해 들어 대만 가권지수는 70% 상승했다. 특히 지난 3분기 대만 증시의 수익률은 코스피를 약 23%포인트 웃돌았다. 이는 2000년 이후 가장 큰 격차다.
대만 증시는 상승세가 일부 대형주에 집중되지 않고 시장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블룸버그가 분석한 결과, 대만 가권지수 구성 종목 가운데 올해 주가가 두 배 이상 오른 기업의 비중은 약 10%에 달한다. 반면 코스피에서는 이러한 종목의 비중이 4.7%에 그쳤다.
여기에 대만은 한국보다 AI 공급망 전반에 걸쳐 더욱 폭넓고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데다 기업들의 실적 전망도 상대적으로 낙관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UBS 글로벌 웰스매니지먼트의 우춘라이 아시아 자산배분 총괄은 “현시점에서는 AI 관련 투자 비중을 단기적으로 확대할 때 대만 주식을 선호한다”며 “대만은 더욱 완전한 기술 하드웨어 생태계를 갖추고 있고 주요 기술기업들의 견조한 투자 계획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