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사진=로이터/연합)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경유(디젤) 가격을 잡기 위해 미국산 경유 수출 금지 카드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이란 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미국이 사실상 글로벌 경유 시장의 핵심 공급자 역할을 맡은 상황에서 미국산 경유마저 끊길 경우, 주요 동맹국은 물론 글로벌 경제가 직격탄을 맞을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 등에 따르면 27일(현지시간) 시카고 인근에서 열린 프레지던츠컵 골프 대회에 참석한 트럼프 대통령은 폭스뉴스 기자와 만나 경유 수출 금지 가능성에 대해 “그렇게 하면 자동차용 휘발유 가격이 다소 오르는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다”며 “그래도 매우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있고, 시행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유 수출 금지에 따른 부작용을 감안하더라도 실제 시행 가능성을 열어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행정부가 90일간 경유 수출을 중단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미국 정부는 아직 공식적인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실제 시행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졌다.
백악관 역시 경유 수출 금지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 일주일 동안 단기적인 미국산 경유 수출 금지가 가져올 파급 효과를 분석해 왔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는 트럼프 행정부가 해당 방안을 상당히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짚었다.
▲지난 5년간 미 경유 판매가 추이(단위:갤런당 달러)(사진=美연준 경제데이터(FRED))
◇ 美 경유값 사상 최고…중간선거 앞두고 정치 부담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은 미국 내 경유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전미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이날 기준 미국 전국 주유소의 경유 평균 가격은 갤런당 6.47달러로 역대 최고가인 6.52달러(9월 22일)에 근접해 있다.
특히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생활비 부담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경유 가격마저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부담도 가중되고 있다.
경유는 농기계뿐 아니라 화물열차와 트럭, 배송 차량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돼 미국 경제 전반의 물류비와 생산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경유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경우 농업·운송·제조업 비용을 끌어올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더욱 키울 수 있다.
이에 미국 농업 지역을 중심으로 경유 수출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백악관의 한 관리는 “트럼프 대통령은 주유소에서 기름값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며 “모든 선택지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AP/연합)
◇ ‘최후의 경유 공급자’로 부상한 미국
문제는 현재 미국이 글로벌 경유 시장에서 핵심 공급국으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미국과 전쟁 중인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한 데다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에 피해를 입은 러시아가 경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글로벌 경유 공급망이 급격히 빠듯해졌다.
이에 미국산 경유를 찾는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의 경유 수출량은 지난달 주간 기준 하루 약 200만배럴까지 치솟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중남미와 유럽 국가들의 미국산 경유 의존도가 크게 높아진 상태다. 에너지 분석업체 케이플러와 보텍사에 따르면 이달 들어 미국산 경유와 유사 연료를 가장 많이 수입한 국가는 농업 강국 브라질로 나타났다. 칠레와 멕시코, 영국, 네덜란드도 미국산 경유의 5대 수입국에 이름을 올렸다.
S&P 글로벌에너지의 윌리엄 오닐 등 애널리스트들은 “미국산 경유 공급이 갑작스럽게 완전히 끊길 경우 가격이 급등하고 소비자와 기업들의 비용 부담도 크게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산 경유를 직접 수입하지 않는 국가들 역시 타격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미국의 수출이 막히면 브라질과 유럽 국가들이 제한된 대체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에 나서면서 글로벌 경유 가격 자체가 상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유값 상승은 물류비와 생산비를 끌어올리면서 글로벌 경제 전반에 연쇄적인 비용 상승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짚었다.
▲미국의 한 주유소에 가격이 안내되고 있다(사진=AP/연합)
◇ ‘동맹 중시’ 바이든과 다른 트럼프…부작용에도 강행할까
그러나 경유 수출 금지가 미국에서도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른다.
경유 수출을 막으면 단기적으로 미국 내 공급이 늘어나 가격을 낮출 수 있지만, 정유업체들의 수익성이 악화돼 원유 정제량 자체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정유업체들은 원유를 정제해 경유뿐 아니라 휘발유와 항공유 등 다양한 석유제품을 함께 생산한다. 이에 경유 수출 제한으로 정유사들이 가동률을 낮출 경우 휘발유를 비롯한 다른 석유제품의 공급까지 감소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동차용 휘발유 가격이 오를 수 있다”고 언급한 점도 이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풀이된다.
미국 정유업계를 대표하는 미국연료석유화학협회(AFPM)의 제프 무디 부회장은 “경유 수출 금지는 역효과를 낼 것”이라며 “미국의 연료 생산 감소와 공급 부족, 에너지 안보 약화, 미국 소비자들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전혀 없기 때문에 민주당과 공화당 행정부 모두 반복해서 연료 수출 금지를 포기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재임 당시 연료 가격이 급등하자 해외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결국 시행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업계에서는 수출 제한이 미국 내 가격을 오히려 끌어올리는 동시에 유럽과 중남미 동맹국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의 피해보다 미국 내 가격 안정을 우선시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클리어뷰 에너지파트너스의 케빈 북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관계에 대해 같은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라며 “’미국 우선주의’를 기준으로 결정을 내릴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