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FP/연합)
미국과 이란의 종전 협상으로 원유 공급이 빠르게 정상화되면서 중동 산유국들의 시장 점유율 경쟁이 본격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 원유를 6년 만에 할인 판매하자 이를 계기로 ‘유가 전쟁’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는 8월 아시아 수출용 아랍 경질유(아랍 라이트)의 공식판매가격(OSP)을 역내 벤치마크 대비 배럴당 1.5달러 할인된 수준으로 책정했다.
이는 7월 OSP보다 배럴당 11달러 낮은 수준으로, 2000년 이후 최대 월간 인하폭이다. 이번 할인 판매는 2015년 미국 셰일 업계를 겨냥한 증산 경쟁과 2020년 코로나19 당시 러시아와의 증산·가격 경쟁에 이어 세 번째다.
OSP는 사우디가 아시아로 수출하는 원유 가격을 두바이·오만산 원유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할인 또는 프리미엄(할증)을 적용해 결정하는 방식이다. 사우디의 OSP는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 등 걸프 지역 산유국들의 가격 책정 기준 역할을 하며 하루 약 900만배럴 규모의 아시아 원유 거래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한국·일본·중국 정유사들의 설비 대부분이 아랍 경질유를 기준으로 설계돼 있어 시장 영향력이 크다.
이번 가격 인하는 미국과 이란의 종전 양해각서(MOU) 체결 이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수송이 빠르게 정상화된 영향으로 풀이된다. 전쟁 기간 해협에 묶여 있던 원유가 한꺼번에 시장에 풀린 데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 산유국들이 생산과 수출을 확대하면서 공급 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이다.
CNBC에 따르면 전쟁 당사국인 이란은 미국의 대이란 해상 봉쇄 해제 이후 4000만배럴이 넘는 원유를 수출했다. 여기에 세계 최대 원유 소비국인 중국의 수입 감소까지 겹치면서 글로벌 원유 시장의 공급 과잉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글로벌 벤치마크인 브렌트유는 전쟁 당시의 상승분을 대부분 반납하며 배럴당 70달러 초반까지 내려왔다. 실물 원유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가장 큰 폭의 할인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아람코의 한 저장 시설(사진=로이터/연합)
아람코의 이번 가격 인하를 계기로 산유국 간 유가 전쟁이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미즈호의 로버트 야거 에너지 선물 디렉터는 “걸프 산유국들이 유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일부 아시아 구매자들은 사우디산 원유 가격이 여전히 역내 다른 산유국들의 현물 가격보다 비싸다고 밝혀 아람코의 추가 가격 인하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사우디의 인하 폭이 예상보다 컸던 만큼 다른 중동 산유국들도 고객 확보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판매가격을 추가로 낮출 가능성이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실제로 트레이더들은 아랍에미리트(UAE) 국영 석유회사 ADNOC가 최근 입찰을 통해 할인된 가격으로 원유를 판매하고 있다고 로이터에 밝혔다. 생산량 제한에 불만을 품고 OPEC을 탈퇴한 UAE는 지난달 하루 380만배럴이 넘는 원유를 생산하며 사상 최대 수준의 산유량을 기록했다.
여기에 OPEC 나머지 회원국들도 가능한 한 많은 원유를 빨리 수출하길 원하고 있는 만큼 유가 관리를 위해 공급을 조절해온 OPEC 체계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분석했다.
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의 그레고리 브루 애널리스트는 “사우디는 OPEC이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하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중동 산유국들이 생산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수출을 늘리기 시작하면 모두가 가능한 많은 원유를 생산하려 할 것이고, OPEC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OPEC과 주요 산유국 협의체인 OPEC+는 합의에 따라 현재 공급 쿼터를 점진적으로 늘리고 있다.
▲지난 1년간 브렌트유 가격 추이(사진=네이버금융)
이 같은 공급 경쟁이 이어질 경우 국제유가가 예상보다 빠르게 하락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인프라스트럭처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제이 해트필드 최고경영자(CEO)는 “향후 한 달 동안 국제유가가 배럴당 60달러선까지 내려갈 것으로 본다”며 “사우디의 가격 인하는 시장 가격 변화를 반영한 것이며, OPEC이 재정 확보를 위해 생산을 최대 수준으로 늘릴 것이라는 점은 이미 예상했던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맥쿼리와 씨티그룹 역시 향후 몇 달 내 유가가 60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관측했다.
다만 이를 곧바로 가격 전쟁의 신호로 해석하기는 이르다는 반론도 있다.
르네상스 에너지 어드바이저스의 아흐메드 메흐디 애널리스트는 사우디의 판매가 인하에 대해 “가격 전쟁의 신호가 아니라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 과정에서 발생한 공급 과잉을 반영한 조치”라며 “중국의 수요를 되살릴 수 있을 만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는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브로커 업체 PVM의 타마스 바르가 애널리스트는 “산유국들이 하락하는 시장에서 원유를 판매하고 있는 만큼 단기간에 유가가 반등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유가 하락은 시간이 지나면서 원유 수요를 자극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