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동구 성수동 소재 대명화학그룹 계열사 오프뷰티의 상설 매장과 현장 내 에어로케이 굿즈들이 전시돼 있는 모습. 사진=박규빈 기자
지난 24일 대한민국 트렌드의 최전선인 서울 성동구 성수동 연무장길 인근, 평일 이른 오후 시간대임에도 거대한 보라색 외관의 창고형 매장 안은 복닥거리고 있었다. 매장 입구에 들어서자 짙은 화장품 향기 대신 공항 특유의 설렘이 방문객을 먼저 덮쳤다.
공항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와 보안 검색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대형 구조물 위로 앙증맞은 보라색 크레이트(우유 박스)가 겹겹이 쌓여 있고, 그 너머로는 도쿄·오사카 등 취항지가 쉴 새 없이 바뀌는 출국장 전광판 종이 모형이 현장감을 더했다. 이곳은 청주국제공항을 거점으로 하는 저비용 항공사(LCC) ‘에어로케이(Aero K Airlines)’가 도심형 뷰티 아울렛 ‘오프뷰티(OFF BEAUTY)’와 손잡고 문을 연 팝업 스토어 현장이다.
◇“주인 잃은 수하물을 엽니다”…4억 원 판돈 걸린 2만9000원의 마법
▲서울 성동구 성수동 소재 대명화학그룹 계열사 오프뷰티의 상설 매장에 에어로케이 랜덤 박스가 전시돼 있는 모습. 사진=박규빈 기자
이날 팝업 스토어 열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건 단연 한정판 랜덤 박스인 ‘미스터리 배기지(Mystery Baggage)’였다. 단돈 2만9000원에 판매되는 이 검은 상자를 품에 안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에어로케이 마케팅 담당자는 “수하물 찾는 곳(Baggage Claim)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인을 알 수 없는 가방 안에 오프뷰티 제품과 당사 항공권이 무작위로 섞여 있다는 테마로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2000개가 준비된 박스 안에는 오프뷰티 인기 뷰티템과 국제선 할인권이 기본으로 깔려 있어 소위 ‘꽝’은 없다. 하지만 방문객들의 진짜 표적은 박스 속에 숨겨진 특급 리워드다.
회사 관계자는 “일부 상자에는 나리타 등 11개 노선의 왕복 항공권이 들어있고, 대망의 1등에게는 2027년 말까지 쓸 수 있는 전 노선 무제한 항공권이 주어진다”며 “화장품과 항공권을 모두 합치면 총 리워드 규모만 4억 원에 달한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취재 도중 1등 ‘1년 무제한 항공권’을 뽑은 행운의 당첨자가 나오면서 매장 분위기는 일순간 축제장으로 변했다.
당첨자 김모 씨는 상기된 얼굴로 “가장 먼저 일본 나리타를 통해 도쿄를 원 없이 가보고 싶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공항 밖으로 튀어나온 에어로케이…“일상의 설렘을 팝니다”
▲에어로케이와의 협업 판매가 이뤄지고 있는 오프뷰티 매장 전경. 사진=박규빈 기자
그렇다면 비행기가 단 한 대도 없는 성수동 뷰티 창고에 에어로케이가 등장한 진짜 이유는 뭘까.
현장에서 만난 에어로케이 관계자는 항공업계의 팍팍한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먼저 그는 “고환율과 기재 공급망 문제 등으로 당분간 무리한 확장 대신 청주 거점에 항공기 8대를 집중시켜 뼈를 깎는 내실을 다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어 “다만 거점이 청주이다 보니 수도권 고객에게 브랜드를 알릴 기회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며 “굳이 비행기를 직접 타지 않더라도 일상 속 다양한 공간에서 우리 회사만의 힙한 브랜드를 노출하고, 여행을 앞둔 설렘을 선사하려는 것이 이번 팝업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에어로케이는 창립 이래 줄곧 항공업계의 경직된 마케팅 문법을 산산조각 내 온 이단아다. 스니커즈 브랜드 마더그라운드와 크루 전용 신발을 기획하고, 동네 독립 책방 다시서점의 큐레이션을 기내에 들이는가 하면 비행기 안에서 가수 선우정아의 게릴라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또한 패션 브랜드 하우스 오브 낭만과 취항지 테마의 모자 컬렉션을 출시하는 등 탑승객을 나르는 운송업을 넘어 ‘여행자의 낭만’을 디자인하는 행보를 이어왔다.
◇유통 거품 싹 걷어낸 ‘오프뷰티’…외국인이 쓸어 담는 K-뷰티 성지
▲오프뷰티 성수점에서 소비자들이 제품을 고르고 있다. 사진=박규빈 기자
팝업의 멍석을 깐 ‘오프뷰티’ 자체도 흥미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무장한 곳이다. 투박한 철제 랙에 1400여 종의 화장품이 빽빽하게 진열된 이곳은 화장품 유통 구조의 ‘허리’를 완전히 끊어낸 뷰티계의 코스트코다.
2020년 첫 출범한 오프뷰티는 화장품 제조사로부터 과잉 재고를 직접 사들여 온라인 판매 일절 없이 오프라인 창고형 매장에서만 정가 대비 최대 90% 후려친 초특가로 승부한다.
오프뷰티 관계자는 “대형 H&B 스토어 가격에는 막대한 마케팅 비용과 중간 벤더 마진이 껴 있지만 우리는 이 거품을 완전히 걷어냈기에 압도적인 가격 경쟁력이 나온다”며 “유통기한 임박 상품은 10% 미만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퀄리티 높은 정상품”이라고 강조했다.
극단적인 박리다매 전략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광장 시장 1호점을 시작으로 단기간에 누적 매출 200억 원을 돌파한 오프뷰티는 현재 전국 30여 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성수점의 경우 방문객의 60~70%가 외국인이며, 명동 상권은 90%에 육박한다. 이들은 중장기적으로 전국 300개 매장 출점이라는 공격적인 청사진을 현실화하고 있다.
◇마뗑킴·보난자 커피까지…성수동 휩쓴 대명화학그룹 ‘라이프 스타일 제국’
▲검은 그래피티로 새겨진 ‘마뗑킴’ CI와 매장 내부. 사진=박규빈 기자
오프뷰티 매장을 나와 고개를 돌리면 놀라운 광경이 이어진다. 거친 흑백 그래피티가 새겨진 K-패션의 상징 ‘마뗑킴(Matin Kim)’과 세련된 우드톤 인테리어의 스페셜티 카페 ‘보난자 커피(Bonanza Coffee)’가 하나의 거대한 타운처럼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세 공간은 모두 권오일 회장이 이끄는 ‘대명화학그룹’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우산 아래 모인 끈끈한 식구들이다.
2015년 작은 블로그 마켓에서 출발한 마뗑킴은 2022년 대명화학 계열 ‘하고 하우스(HAGO HAUS)’의 투자를 받은 뒤 연매출이 50억 원에서 단숨에 수백억 원대로 뛰었고, 올해 2000억 원대 진입을 조준하는 글로벌 브랜드로 급부상했다. 2023년 말 홍정우 단독 대표 체제로 전환한 마뗑킴은 코치(Coach) 등과 협업하며 APEC 정상회의 공식 협찬사로도 선정됐다. 2024년엔 에어로케이와 협업해 한정판 승무원 유니폼을 선보이기도 했다.
▲대명화학그룹이 독일 보난자 커피로부터 국내 영업권을 확보해 운영 중인 성수 매장. 사진=박규빈 기자
‘유럽 5대 카페’로 불리는 독일 베를린 태생의 보난자 커피 역시 2016년 한국 진출 이후 대명화학과 하고 하우스의 전폭적인 릴레이 투자를 바탕으로 국내 핵심 상권에 스며들었다. 까다로운 베를린 로스팅 원칙을 고수하는 이 프리미엄 커피는 현재 에어로케이 기내 메뉴로 채택돼 탑승객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다.
대명화학그룹의 촘촘한 브랜드 생태계와 에어로케이의 영리한 일탈이 합작한 이번 성수동 팝업은 대중의 평범한 일상을 여행의 순간으로 바꿔버린 당찬 합동 비행이었다. 다시 말해 연무장길 일대는 뷰티(오프뷰티)로 가꾸고, 패션(마뗑킴)을 입으며, 식음료(보난자 커피)를 즐기는 대명화학그룹의 거대한 ‘라이프 스타일 유니버스’가 구현된 쇼케이스 공간인 셈이다.
에어로케이와의 협업 행사는 오는 26일까지 이어진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