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더(사진=EPA/연합)
인공지능(AI) 투자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불거지면서 글로벌 증시가 흔들리자 투자자들이 미국 국채와 일본 엔화 등 전통적인 안전자산으로 몰리고 있다. 여기에 중동 지역의 긴장 고조와 프랑스의 재정 불안 및 시위 확산까지 겹치면서 위험자산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23일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글로벌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미국 10년물 국채금리는 전날 하루에만 19.3bp(1bp=0.01%포인트) 급락했다. 이는 2024년 8월 이후 최대 일일 하락폭이다.
이에 따라 10년물 국채금리는 약 한 달 만에 처음으로 5% 아래로 떨어졌다. 이날에도 4.9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다른 만기의 국채금리도 일제히 하락했다. 통화정책에 민감한 2년물 국채금리는 18.8bp 떨어졌으며, 30년물 국채금리도 15bp 하락했다. 국채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이는 만큼 미국 국채시장 전반에 강한 매수세가 유입됐다는 의미다.
안전자산에 대한 수요는 일본 외환시장과 국채시장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전날 달러당 158엔대에서 이날 오전 156.1엔 수준까지 급락(엔화 강세)했다.
일본 국채 가격도 급등했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이날 한때 12.5bp 하락한 2.755%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8월 6일 이후 최저 수준이다. 5년물 국채금리도 장중 최대 10.5bp 떨어진 2.185%까지 내려갔다.
이처럼 글로벌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으로 몰리는 배경에는 AI 산업에 대한 투자심리가 악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올해 미 10년물 국채금리(사진=트레이딩뷰)
그동안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국채금리는 국제유가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와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AI 인프라 투자를 위한 기업들의 대규모 회사채 발행 등의 영향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최근에는 AI 산업에 투입되는 천문학적인 투자금이 실제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AI 관련주들이 급락하자 투자자들이 주식 등 위험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국채시장으로 자금을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를 추종하는 필라델피아 반도체지수는 전날 장중 최대 7.3% 폭락하며 지난 7월 말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술주 중심의 나스닥 종합지수도 2.60% 급락한 2만6008.86에 거래를 마쳤다. 이는 지난 6월 이후 가장 큰 일일 하락 폭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DBS은행의 유진 레오우 선임 금리 전략가는 “투자자들이 AI 관련 자산을 재평가하면서 최근 시장 심리가 더욱 불안정해진 것으로 보인다”며 “미국 국채금리가 최근의 역사적 수준과 비교해 여전히 높은 만큼 투자자들은 국채를 안전자산으로 선택해 일부 위험을 헤지하려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 프랑스의 재정 불안과 반정부 시위 확산도 안전자산 선호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막대한 국가부채와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생활비 부담과 정부의 재정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프랑스 국채금리는 이달 들어 2002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으며, 독일 국채금리와의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사진=로이터/연합)
주목할 점은 국제유가가 급등하고 있음에도 채권과 일본 엔화가 강세를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12월물 브렌트유 선물 가격은 전날 4% 급등한 데 이어 이날도 상승세를 이어가며 배럴당 114달러를 넘어섰다. 이는 지난 5월 이후 최고 수준이다. 예멘의 친이란 후티 반군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공격을 확대하면서 중동 지역의 원유 공급에 추가적인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유가를 밀어 올리고 있다.
통상 국제유가 급등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해 국채금리 상승과 채권 가격 하락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소비와 기업활동을 위축시켜 경제성장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이에 투자자들이 인플레이션보다 경기 둔화 가능성에 더욱 주목하면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호주내셔널은행의 케네스 크롬프턴 금리 전략 총괄은 “국제유가가 점진적으로 상승하고 있음에도 미국 국채시장에는 다시 안전자산을 찾는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전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시장에서는 당초 오는 12월로 예상했던 기준금리 0.25%포인트 인상 시점을 내년 1월로 늦춰 반영하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인베스코의 로버트 월드너 채권부문 공동 총괄 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몇 달 동안 미 국채금리가 급등한 이후 금융시장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를 기다려 왔다고 밝혔다.
그는 “미 국채금리는 극단적인 수준까지 상승했다”며 AI 산업을 둘러싼 우려를 고려하면 “적어도 당분간은 금리가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최근 국채 가격의 급등이 지속되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사 ING의 애널리스트들은 “미 국채금리가 5% 아래에 머무를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라며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 AI 투자 흐름 등을 고려하면 10년물 국채금리가 결국 다시 5%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이어 “위험자산 회피 분위기가 다음 주 연준의 금리 인상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장기채 비중을 확대할 시점이라고 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박성준 기자 mediapark@ekn.kr
